차이나는 클라스 인문학편
지리는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가
그리스와 이슬람, 그리고 영국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영토를 세계 무대로 확장한 나라
플라톤은 철학을 무엇이라 생각했나
플라톤은 철학이란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지, 글만 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답은 "안 된다고" (띄어쓰기)야.
이유:
- "안"은 부정 부사야 ("~하지 않는다"는 뜻)
- "되다"는 동사야.
- 부사 "안" + 동사 "되다"는 항상 띄어 써야 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교가 불가능한 대학자다.
철학을 말하려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교가 불 가능한 대학자라고 배웠는데요.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로소푸스(philisophus)' 라고 불렀죠. 그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의 대명사였던 겁니다.
영국 철학자 솔즈베리의 존은 "그는 새벽녘의 별 같았고, 세상을 환히 비추어주었다"고 칭송했고요. 아리스토텔레스 하면 대개 철학자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서양 모든 학문의 기초를 놓은 사람입니다. 논 리학, 물리학, 천문학, 화학, 생물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시학까지요. 오늘날 자연과학으로 분류되는 모든 학문의 기원을 거슬 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게 돼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의 중심에 선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죠. 이데아론을 정립하고 철학자가 최고 권력을 갖는 '철인정치'를 주장한 학자입니다.
**이데아론(Theory of Forms, 이데아 이론)**은 플라톤이 주장한 핵심 이론인데, 간단히 말하면 이거야:
-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것은 불완전해.
- 그런데 **진짜 완벽한 본질(진짜 모습)**이 따로 존재하는데, 그걸 이데아라고 불러.
예를 들면:
- 우리가 보는 "의자"들은 다 다르게 생겼지만, **'완벽한 의자'**라는 개념(이데아)은 변하지 않고 존재해.
- 현실 세계는 그 이데아를 흉내낸 그림자 같은 거고, 진짜 진리는 눈에 안 보이는 이데아 세계에 있어.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실은 불완전한 모조품이고, 진짜는 보이지 않는 이데아 세계에 있다."
추가로 플라톤은 이런 이데아를 **'오직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했어. 그냥 눈으로 보는 걸로는 절대 진리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
혹시 이데아론을 설명할 때 플라톤이 자주 들었던 "동굴의 비유"도 궁금해? 🔥
(진짜 멋진 비유야!)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국가》**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야. 이걸로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쉽게 설명하려고 했어.
내용은 대략 이래:
상상해 봐.
- 어떤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깊은 동굴 안에 갇혀 있어.
- 이 사람들은 손발이 묶여서 고개도 못 돌리고, 동굴 벽만 바라보면서 살아.
- 뒤에서는 불빛이 있고, 사람이나 물건이 불빛 앞을 지나가.
- 이 사람들이 벽에 비치는 그림자만 보고 세상을 배워.
이 동굴 안 사람들은 그림자만 보니까,
"세상은 그림자가 전부야!" 라고 믿어.
근데!
- 만약 누군가가 묶인 걸 풀고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 처음에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못 보겠지.
- 점점 시간이 지나면 진짜 사물, 진짜 세상을 보게 돼.
- 그리고 깨달아. "아, 그때 본 그림자는 진짜가 아니었구나!"
그럼 이 사람은 다시 동굴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야, 우리가 보던 건 진짜가 아니야! 진짜 세상은 밖에 있어!"
라고 알려주려고 해.
하지만!
- 아직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아.
- 오히려 비웃고 무시하거나, 심하면 공격하려고 해.
플라톤이 말하고 싶었던 것:
- 동굴 =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 (불완전한 세상)
- 그림자 =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것 (모조품)
- 동굴 밖 진짜 세계 = 이데아의 세계 (완전한 진리)
- 동굴 밖으로 나가는 사람 = 철학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요약하면:
우리는 대부분 그림자(겉모습)만 보고 살지만, 진짜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고통을 견디고 "이데아 세계"로 나아가야 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미아에 입학했을 때 플라톤이 예순 살이었으니 마흔세 살 쯤 차이가 납니다. <아테네 학당>에 그려진 플라톤이 일흔을 훨씬 넘긴 나이의 모습이니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른이 넘었겠죠.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둘 다 고대 그리스 사람이야.
정리하면:
- 플라톤(Plato): 기원전 427년 ~ 기원전 347년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년 ~ 기원전 322년
둘 다 아테네(플라톤)나 스테기라(아리스토텔레스 출생지)처럼 고대 그리스 지역 출신이고,
플라톤은 아테네에 아카데미아 세웠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기 제자로 들어갔지.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도 리케이온(Lyceum)이라는 학교를 따로 세우고!
그 유명한 라파엘로 그림 <아테네 학당> 에서 플라톤이랑 아리스토텔레스 나란히 걸으면서 손짓하는 것도 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장면이야.
플라톤이 왼속에 들고있는 건 <<티마이오스>>라는 책입니다. 조물주가 어떻게 이데아의 세계를 본보기로 삼아 자연 세계를 만들었는지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런가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들고있는 책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이름이자 아들의 이름이기도합니다.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삶을 위한 책을 썼어요. 지상의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윤리적 영향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개발하고 어떻게 생각의 능력을 키워야 지혜로운 사람으로 훌륭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기록한 책이에요.
감정은 두 마리의 말, 이성은 고삐를 쥔 마부와 같다. 제멋대로 질주하는 감정을 조종하지않으면 ‘영혼의 마차’는 길을 벗어나게 된다.
플라톤 <<파이드로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아시아의 아소스를 거쳐 에게해의 레스보스섬에 가게 됩니다. 레스보스섬의 칼로니 마을에 가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주로 어업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에서 3년 정도 머물렀는데요. 이 덕분 에 레스보스섬은 역사에 남을 장소가 되었지요.
어떤 장소로요?
레스보스섬이 서양 생물학의 발생지가 된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레스보스섬에서 물고기들과 새들을 관찰하고 연구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가 갑자기 생물학에 빠진 건 왜죠?
앞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했었죠. 아리스토 텔레스는 어릴 때부터 생물학자로서의 눈을 먼저 키운 셈이에요. 생물 학을 기반으로 생명을 바라보는 방법을 정치에도, 철학에도 적용했던 것이죠. 그래서 큰 틀에서 플라톤의 철학이 기하학적이고 수학적이라 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생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물학을 연구했나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레스보스섬에 머물면서 어부들에게 묻고 직접 관 찰해 생물들에 대한 지식을 얻었어요. 그리고 그 기록들을 엮어 책을 펴냅니다. 바로 《동물지》예요. 아리스토텔레스가 탐구한 500여 종의 동물들에 대한 기록이 집약돼 전체 9권으로 구성된 책에 담겼습니다.
흑사병도 중세 시대에 창궐했던 전염병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흑사병, 즉 페스트는 14세기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전염병입니다. 페스트를 통해 유럽인의 마음에는 죽 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죽음의 춤 이라는 예술 장르에 이런 마음이 투영됐어요. 죽음의 표식으로 해골을 사용한 것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쳤군요.
네. 당시 시대상을 잘 드러내는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바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 즉 '죽음을 기억하라'예요. 죽음은 황제도 교황도
주교도 피해갈 수 없죠. 계급과 직책을 가리지 않습니다. 또 부유하거 나 가난하거나 아름답거나 못난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처럼 죽음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걸 일깨우고자 중세 후기에는 죽음과 관련된 그림이 많이 그려졌습니다.
일반적으로는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 후 1492년 에스파냐에서 무어인들이 추방되는 시기까지를 중세 시대 라고 부릅니다.
무어인들이 중세 시대에 에스파냐에 있었던 얘기네요. 그런데 무어인 은 정확히 누굴 지칭하는 거죠?
에스파냐의 영어식 표현이 스페인이에요. 무어인은 당시 에스파냐가 있던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이슬람교도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서구 의 중세 시대는 그리스도교만을 연구해선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중세는 서구의 그리스도교 문명과 동방의 이슬람교 문명이 첨예하게 맞 부딪힌 시대였어요.
중세 하면 그리스도교에 지배된 시기라고만 여겼는데 그런 생각의 틀을 깨야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 문명은 잘 알고 계신 것처럼 한 유대인 아기 가 마구간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됐죠. 그 아기는 오래 살지 못하고 서른세 살에 십자가에서 처형됐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후 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며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합 니다. 하지만 그만큼 엄청난 박해도 받게 되죠.
그리스도교인 박해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64년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자, 시민들은 화재의 원흉으로 네로 황제를 지목하며 분노했어요. 네로 황제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책임을 덮어씌웠죠. 심지어 원형 경기장에 교인들을 모아놓고 죽이기 까지 했어요. 이 같은 박해가 대략 300년이나 지속됐습니다.
끔찍하네요. 박해를 멈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특별한 칙령을 발표합니다. 바 로 밀라노 칙령이에요.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를 정식 종교로 허용 한 겁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30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 노플을 로마 제국의 수도로 정합니다. 그곳이 바로 지금 터키의 이스 탄불이에요.
박해받던 그리스도교가 이후 로마 제국의 국교까지 된 것인가요?
네. 밀라노 칙령 이후 약 80년에 걸쳐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영토 였던 지중해 연안을 따라 서서히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마 침내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 로 선포합니다.
로마 제국의 역사는 그 후로 어떻게 전개되나요?
어쩌다 평화가 깨지게 되나요?
이 시기 서구 여러 나라는 각자의 영토를 유지하면서 큰 문제없이 지내고 있었어요. 또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두 종교 세력도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죠. 그런데 11세기에 이르러 그걸 깨뜨리는 사건 이 벌어집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입니다.
성지 순례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는데 왜 굳이 성지를 차지하기 위 한 전쟁을 벌이게 된 건가요?
중세의 평화를 깨트린 십자군 전쟁은 1096년부터 1291년까지 200년 동안 여덟 차례에 걸쳐 벌어집니다.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이슬람 세계의 신흥 세력인 셀주크튀르크족의 등장이에요.
그들이 그리스도교에 위협을 가했나요?
네. 셀주크튀르크족은 이슬람 세계에서 주로 용병 역할을 했던 민족입 니다. 그런데 이들이 워낙 싸움에 능하다 보니 바그다드에 이어 페르 시아 사산 왕조의 영토까지 정복해버렸어요.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 탄티노플까지 위험하게 된 거죠. 그 바람에 그리스도교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셀주크튀르크족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순례자 를 위협하고 목숨을 빼앗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거기다 예루살렘 성묘 교회도 파괴했어요. 이 교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안장된 묘 지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성지로 꼽히는 곳인 데 말이죠.
그리스도교인들이 큰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었겠네요. 그래서 어떻게 대처했나요?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편지를 씁니다. 비잔틴 제국으로서는 셀주크튀르크족이 콘스탄티노플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아낼 힘이 없었거든요. 교황은 그 편지를 보고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회라니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는 그리스도교가 로마 가톨릭교회와 비잔 틴 그리스정교로 갈라져 있었어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도움을 베풀면 서 그리스정교를 교황인 자신의 영향력 안으로 끌어들이겠다고 생각 한 것이죠.
교황 외에 가톨릭계의 다른 인사들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종교 회의가 열립니다. 종교 회의 자 리에 모인 모든 사람 앞에서 우르바노 2세가 연설을 했어요. "짐승 같 은 야만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으니 그들의 손으로부터 다시 거룩한 예루살렘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요.
1. 비잔틴 제국이 뭐냐?
비잔틴 제국은 ‘동로마 제국’이라고도 해.
서기 395년에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졌는데, 동쪽은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을 수도로 삼고 1000년 넘게 버텼어. 그래서 비잔틴 제국은 “로마 제국의 동쪽 절반”이라고 생각하면 돼.
즉, 이탈리아에 있던 서쪽 로마 제국(서로마 제국)과는 다른 나라야.
서로마는 5세기경 망했지만,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은 15세기까지 계속 존재했어.
2. 콘스탄티노플은 뭐냐?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야.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세운 도시라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부른 거야. (뜻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거대한 도시 중 하나였어.
3. 기회라니, 무슨 기회?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알렉시우스 1세의 도움 요청을 받았을 때, 이렇게 생각했어:
• “서유럽 기사들을 모아서 이슬람 세력(셀주크 튀르크)과 싸우게 하면, 교황권을 강화할 수 있겠다!”
•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는 명분도 생기겠다!”
• “서유럽과 동로마(비잔틴 제국)를 다시 하나로 묶을 수 있겠다!”
그래서 이걸 **‘십자군 원정’**으로 이어지게 만든 거야. 교황이 주도해서 서유럽의 귀족, 기사, 평민까지 모아 성지 탈환 전쟁을 벌인 거지.
요약하면,
비잔틴 제국은 동로마 제국이고,
콘스탄티노플은 그 수도야.
그리고 교황은 동로마의 요청을 받아들인 척 하면서 자기 정치적 기회로 삼은 거야.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문화가 만나면서 빚어낸 문화유산이 죠. 이 밖에 서구는 특히 과학 분야에서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 데요. 알코올(alcohal)• 알칼리(alkal) 알고리듬(algonthe )··· 혹시 이들 용 어에서 공통점이 뭔지 감이 오시나요?
앞 글자에 알이 공통적으로 들어가는데 그게 이슬람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맞습니다. 알(al)은 아랍어 정관사예요. 영어의 정관사 더(the)와 같 은 것이죠. 16~17세기에 아랍어 지식이 없던 서구 유럽인들은 아랍 어 정관사 알이 붙은 아랍어 단어들을 그대로 흡수했어요. 그렇게 굳 어진 단어들로 알케미(alchemy 연금술), 알제브라(algcbra 대수학), 알렘빅 (alembic 증류기) 등도 있습니다.
주로 화학이나 수학과 관련된 말이 많네요.
큰 범위에서 보면 과학에 관한 것들이죠. 특히 알코올• 알칼리 등은 금 을 만드는 기술인 연금술과 관련된 단어들이에요. 당시엔 여러 가지 물질을 녹였다가 새롭게 조합하면 금이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물질을 열심히 쪼개고 녹이고 합치는 기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알 칼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다양한 화학 물질도 찾아냈는데 그중에는 불 을 가하면 휘발되는 액체가 있었죠. 바로 알코올입니다. 결과적으로 연금술로 금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다양한 실험을 통해 화학 분야를 엄청나게 발전시켰습니다.
역설적으로 이슬람 문화가 술을 빚는 기술도 발전시킨 셈이네요.
그렇습니다. 이슬람교도는 음주가 금지돼 있지만 그들이 만든 알코올 증류 기술이 서구 세계로 전과되면서 다양한 주류를 만드는 데 활용됐습니다.
그리스와 로마는 무엇이 다른가?
그리스와 로마 예술이 어떻게 다르다는 건가요?
이전까지는 그리스를 로마의 아버지별로 여겼을 뿐 세세한 차이를 몰랐죠. 그러다 빈켈만이 구분을 짓습니다. 방대한 그리스 자료를 살펴 보면서 로마와는 완전히 다른 예술이라는 걸 밝히냅니다.
가장 대표적인 차이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그리스주의는 단순함, 로마주의는 화려함이에요. 빈젤만은 그리스주의를 노블 심플리시티(noble simpliciy), 즉 기품 있는 소박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18세기 이전 바로크 시대에는 노블이라고 하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형식의 귀족 예술을 일컫었어요. 그런데 빈켈만 이 심플한 것이 노블하다고 정반대 해석을 내놓은 겁니다. 노블과 심플리시티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을 하나로 묶어버린 거예요.
노불 심플리시티가 구현된 건축은 어떤 건가요?
건축에 대입해보면 그리스 시대의 기둥 건축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균과 바이러스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일반적으로 설명하자면 세균의 크기가 훨씬 더 커요. 하지만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활하는 방식입니다. 세균은 혼자서 살 수 있지만, 바 이러스는 기생을 해야만 살 수 있죠. 이것이 가장 중요한 차이점입니 다. 따라서 바이러스는 아무리 영양분이 많아도 살아 있는 세포가 없 으면 증식을 못 해요.
좀 더 자세히 우리 몸에 있는 면역세포들을 소개해주세요.
먼저 '먹돌이'라는 별명을 붙인 세포입니다. 딱 보기에도 마구마구 먹게 생겼죠?
영어로는 매크로파지(macrophage), 한국말로는 대식 세 포라는 전문 용어로 불립니다. 다음으로는 '먹돌이'와 아주 친한 세포 가 있는데 저는 순찰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이 세포도 먹긴 먹는데 소화를 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순찰을 다닙니다. 영어로는 덴드리틱 셀(dendrictil cell), 한국말로는 수지상 세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 가 '스파이더맨'이라고 별명을 붙인 것이 있어요. 영어로는 뉴트로필 <neurophil>, 한국말로는 호중구라는 세포예요. 진짜 스파이더맨처럼 자신의 dna를 그물처럼 밖으로 뿜어서 세균을 잡습니다.
사이토톡식 T셀(cytotoxic T-cell), 소위 킬러 T셀이라고 불리는 세포가 있습니다. 저 또한 '킬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포는 바이러스 에 감염되었거나 하는 문제가 있는 세포 옆에 가서 직접 죽이는 역할 을 합니다.
주인공들은 모두 등장한 것 같은데, 드라마는 어떻게 펼쳐지나요?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입하면 본격적으로 드라마가 시작 됩니다. 자, 그런데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최초로 침입하는 사건의 현장은 어디일까요? 바로 점막입니다.
엄마의 몸에서는 태아를 공격하지 않잖아요?
그렇죠. 만약 태아를 공격하면 죽겠죠.
그럼 태아는 어떻게 엄마의 몸에서 살아남는 것이죠?
엄마와 태아를 이어주는 태반이란 게 있습니다.
태반에는 면역을 억제 하는 굉장히 다양한 기전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적어도 엄마의 몸은 태아에 대해선 면역을 억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습관성 유산을 하는 분들이 있죠. 일부 엄마들 의 경우에는 태아에 대해서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거예요.
엄마와 태아가 면역반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혼란스럽네요.
여러분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기 위해 일부러 혼동을 일으킨 겁니다.
이와 관련된 주제로 폴리 마칭어(Polly Matzinger)라는 분이 *위험 이 론'이라는 걸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150년간 면역학에서 가정 중요하게 생각해온 나와 남의 구분이라는 개념이 잘못된 것 같다고 했 어요. 남이 내 몸에 들어올 때 위험하면 반응을 하는 것이 맞지만, 위 험하지 않으면 굳이 반응을 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우리 몸이 돌아
가는 게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의 주장이 옳았나요?
네, 옳았습니다.
정밀의학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이 있습니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이자 전 CEO인 스티브 잡스죠, 잡스는 2011년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 습니다. 당시에 그를 잃은 것도 뉴스였지만, 잡스가 시도했던 이른바 유전자 시퀀싱(DNA sequencing DNA 염기서열 결정법) 시도가 과학계에 선 엄청난 화제였습니다. 잡스가 자신의 췌장암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2003년이었다고 해요. 그가 갖고 있던 암은 췌장의 아일렛 세포 신경 내분비계 종양이라능 희소암이었습니다. 수술을 통해 암을 극복했다고 알려졌다가 2008년 재발했었죠.
잡스가 시도했다는 유전자 시퀀싱이라는 게 무엇인가요?
유전자 전체의 염기서열을 결정한 다음에 어떤 돌연변이가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약을 찾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마도 잡스는 의사와 상의 후 간 이식을 받은 뒤에도 암이 재발하자 자신의 암이 희귀하다는 것, 그래서 기존 의학으로는 치료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자신의 질병을 굉장히 전문적으로 분석한 것 같네요.
그렇죠. 잡스는 당시에 유전자 시퀀싱을 했던 20명 중 1명이었어요.
소문에 의하면 당시 유전자 시퀀싱을 하는 데 1억 2000만 원이나 지 불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잡스의 유전자를 시퀀싱해서 63개의 돌 연변이를 찾았어요. 하지만 어떤 돌연변이를 표적화해서 어떤 약을 써 야 하는지 밝혀내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 고 잡스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도 그런 시도들이 훗날 의학계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요?
안타까운 것은 만약 잡스가 3년만 더 살았으면 치료 약이 나왔을 거라 는 말도 있다는 거예요. 그사이에 임상시험 중이던 약들이 이제 허가 를 받기 시작하고 있거든요. 물론 치료 효과를 확실할 순 없지만요.
그때 당시는 시퀀싱이 1억이고 지금은 100만 원 정도 든다고함
르네상스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인간의 관심이 천상의 세계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그래서 세상의 주인 공인 인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다시 쓴 시기를 근대, 곧 르네상스 시 기라고 합니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다시 태어나다'라는 뜻이지요.
그 같은 르네상스의 정신을 대표하는 미술 작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 나요?
르네상스 시대의 정수와 같은 증거물은 누드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을 부끄러운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인체를 드러낸 겁니다.
누드화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예술과 외설 논란이 제기되는데 당시에 도 그런 논란이 있었나요?
하나의 방향으로만 볼 순 없습니다. 누드화의 가장 큰 매력은 두 개의 경계, 소위 예술과 외설 사이에서 작가가 얼마나 긴장감 있게 작품을 풀어갔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역사에서 르네상스 시기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같은 작품들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데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예술 작품들이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을 모방했거나 거기서 영감을 받은 것들입니다. 광고 나 다양한 문화 상품에 자주 등장하고 있죠.
르네상스 시기 이전엔 어떤 미술 작품들이 있었나요?
르네상스 이전의 시기를 중세라고 부릅니다. 암흑기라고도 하는데요.
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류나 한계를 반성하고 고민하던 시기입니 다. 그리고 인간의 삶의 가치가 지상이 아닌 천상에 있었던 시기이기 도 합니다. 그래서 미술에 대한 표현 역시 조금 억제됐던 시기라고 할 수 있죠.
바로크 시기엔 신 또는 왕실에 대한 그림이 주를 이룬 것 같습니다. 이후의 화가들은 무엇을 그리게 되었나요?
굉장히 중요한 지적입니다. 이제부터는 보통 사람의 눈높이로 미 술이 내려오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브뤼(Pieter Brueghel)이라는 작가가 그린 〈농민의 결혼식〉을 보도록 하죠. 혹시 이 작품을 보면서 떠오르는 그림이 있나요?
글쎄요, 긴 탁자 주위에서 손님들이 먹고 마시고 있네요.
자세히 보면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브뤼 이 자기 방식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한마디로 패러디의 원조였던 것이 죠. 브뤼할이 활동하던 지역은 개신교가 등장한 북유럽이었습니다. 그 래서인지 가톨릭의 전통을 살짝 비틀고 조롱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죠.